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신광박(申光璞)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對日談論으로서 울릉도・독도
본 연구는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선행 연구 성과를 토대로 17세기 후반
‘울릉도 쟁계(일명 안용복 사건)’ 이후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울릉도・독도
를 둘러싼 담론과 그 인식을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.
1693년~1696년에 걸쳐 있었던 안용복의 도일과 조일간의 울릉도를 둘
러싼 영유권 논쟁인 ‘울릉도 쟁계’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울릉도와 부속도
서인 독도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. 그 결과 독도의 존
재를 재확인하게 되었고, 이후 편찬된 관찬사서나 개인문집에서 울릉도와
독도는 별도의 섬으로 우리의 땅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.
17~8세기가 되면 일본을 직접 견문한 통신사행원들이 남긴 사행록을
통하여 일본의 사회상과 문물이 점차 조선사회에 소개되고, 임진왜란 후 1
세기가 지남에 따라 임진왜란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객관화할 수 있는
시점이 되면서, 실학자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일본관에 변
화가 생기게 되었다. 그들의 일본관은 관료층을 비롯한 대다수의 지식인
들보다 참신하고 개방적이었다. 이러한 대일인식은 ‘울릉도 쟁계’와 안용
복에 대해서도 투영되어 주요 대일담론으로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술
을 다수 남기게 된다.
18세기 조선지식인의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담론은 당시 지식인들의
현실인식과 조일관계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내용에 가감이 이루어져
전승되었는데 그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.
첫째, 그들은 일본에서 말하는 竹島는 조선의 울릉도이며, 松島는 우산
도(독도)라는 사실을 언급하고,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성을 상세하게 기술
함으로서 두 섬이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하였다.
둘째, 조일간의 울릉도 분쟁이었던 ‘울릉도 쟁계’와 울릉도를 지킨 인물
로서 ‘안용복’을 주목하여 별도의 항목을 두면서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,
안용복을 영토문제 뿐 아니라 조일관계에서도 대마도의 음흉한 계략과 이
중성을 폭로하여 대마도에 대한 재인식을 촉발시킨 인물로 그리면서 ‘영
웅호걸’로 평가하였다.
셋째, ‘울릉도 쟁계’의 전개와 종결 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하면서 안용복
의 도일 행위를 울릉도 영토문제에 국한한 것 아니라 조일관계 전반에 대
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정치행위로 이해하였다.
넷째, ‘울릉도 쟁계’라는 울릉도 영유권 논쟁이 막부의 뜻이 아니라 대
마도의 ‘야욕’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함으로써 막부에게는 우호적이고, 대
마도에게는 부정적인 태도와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. 대일인식에 있어서
이러한 이분법적인 경향성은 조선후기 일본에 관심을 가졌던 대부분의 학
자들이 가진 공통적인 인식이며, 다른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당대인들이
가졌던 일반적인 대일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.